가장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리뷰입니다. 처참하고 차가운 전선 속에서도 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형의 따듯한 형재애를 느낄 수 있었으며 전쟁의 양상 및 역사 전개를 소개해봤습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수고해주시는 국군장병에 대한 이야기도 포스팅 마지막에 적어두었습니다.
너무 아픈 전선 속 형제의 따듯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던 스토리
진태와 진석은 서로 형제 사이이다. 부유하지 못한 집안 환경 때문에 형인 진태는 가족을 위해 일찍이 일을 시작했고 동생인 진석은 형의 부응에 보답하듯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행복할 줄만 알았던 형제에게 칼바람이 불고 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기습 남침을 시작으로 한반도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바뀌게 된다. 진태 가족 또한 피난을 떠나 대구까지 내려온 상황이었지만 전국의 피난민이 몰려 대구 또한 아수라장이었다. 이곳에서 진태와 진석은 헌병에게 발각되어 징집대상으로 전방에 끌려가게 된다. 가족들과의 생이별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전방의 국군은 많은 사상자로 인해 전투력이 고갈되었고, 피난길에 오른 만 18세에서 30세까지의 남자들은 최전방 전선으로 끌려가는 상황에 진태와 진석은 착출 당한 것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선은 빗발치는 포탄과 총알로 인해 평소 심장이 좋지 못했던 진석과는 맞지 않는 현장이었고 형인 진태는 동생을 걱정하며 동생을 후방병원으로 보낼 것을 대대장에게 요구하게 되면서 큰 공을 세울 명분이 생긴 상황이었다. 전선의 상황은 전혀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북한군의 포위망을 뚫어내야 했던 국군은 기습작전을 세워 적진을 먼저 공격했고 그 전투에서 국군은 큰 승리를 얻었으며 영웅과 같이 활약한 진태는 큰 공을 세웠다. 이후의 미해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국군의 승전보를 울리고 있었다. 진태는 앞으로도 이어지는 전투 속에서 많은 공을 세우면 승승장구하지만 동생은 훈장을 따내려 물불 안 가리는 형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진태는 끝내 태극무공훈장을 받으며 동생인 진석을 제대시킬 수 있게 되었다. 좋은 날만 이어질 줄 알았지만 진석은 남겨진 가족을 보기 위해 탈영을 감행했고 그 때문에 국군에게 포로와 함께 진석은 창고에 갇히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대를 약속한 대대장 또한 바뀌게 되며 진석의 제대를 확실히 가늠할 수도 없던 그 상황 속에서 갑작스러운 북한의 침공으로 대대장은 포로와 함께 있던 진석의 창고를 소각시킬 것을 명령했고 형인 진태는 동생이 처절히 불타 죽는 모습을 보고 눈이 뒤집혀 그때부터 북한군으로 전향하게 된다. 하지만 진석은 죽지 않았다. 전우였던 양주사 덕분에 창고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후방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진석은 형이 북한군이 되었다는 신문을 보고 형을 만나러 다시 전선에 투입한다. 전선에서 진석은 다시 탈영을 감행하며 북한군에 투항해 형을 만나려고 하지만 형을 만나긴 쉽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미군의 항공폭격이 이어지며 전선은 아수라장이 된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진석은 형인 진태를 저 멀리서 보게 된다. 눈이 뒤집힌 형이었지만 얼마 안 가 진태는 동생인 진석을 알아보고 진석에게 도망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밀려 들어오던 북한군을 저지하다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은 지나 2003년 유해발굴단에게 발견된 진태의 유골을 할아버지가 된 진석이 보게 되면서 진석이 슬픔에 잠기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막을 내린다.
처절한 6.25 전쟁의 역사전개
전 세계적으로 끔찍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식민지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일본의 패망에 따라 독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38도선 기준으로 북한은 공산주의였던 소련의 간접지배를 받게 되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였던 미국의 간접지배를 받게 된다. 서로 하나가 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분단이라는 쓰디쓴 아픔을 다시 겪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바야흐로 때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소련의 전차로 무장해 남한을 기습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끔찍했던 3년간의 6.25 전쟁이 시작된다. 남한은 3일 만의 수도인 서울이 북한에게 함락당했으며, 거듭되는 사상자와 매서운 공격으로 인해 국군은 최후방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고 북한군과 대립한다. 그렇게 대립이 이어지던 어느 날 1950년 9월 15일에 미해군이 인천에 성공적으로 상륙하며 한반도의 전세를 뒤엎는다. 국군과 미군은 같이 연합하여 북한의 평양까지 진격하는 쾌거를 이루지만, 위기를 느낀 북한의 수뇌부는 수많은 병력의 중공군과 북한군을 준비시켜 진격시키고 국군과 미군은 이들의 힘에 못 이겨 한강 이남에 새로운 전선을 구축해 서로 대치하며 먹고 먹히는 고지전이 시작된다. 서로 계속되는 고지전 끝에 양국은 휴전을 합의하며 현재까지도 전쟁은 종전되지 않은 채 휴전상태이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할 역사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할 역사임을 깨달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국군장병이 징병되어 군복무기간 동안 나라를 지키는데 힘을 쓴다.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우리가 편하게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느끼며 오늘도 편하게 잘 수 있는 것이다. 분단이란 아픔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은 고생을 하고 있는 이산가족과 평생 가는 전쟁의 후유증에 고달파하는 6.25 참전 용사는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있다. 그분들의 희생과 노고에 감사드리며 우리는 후세에 절대 이런 쓰디쓴 역사를 물려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다짐을 하게 되었다.